그리며 하루하루_일상 4: 화초 가꾸며 드는 생각 한움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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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를 하고 한 달 만에 한국에 잠깐 다녀왔더니 집안 곳곳의 화초들이 더러 죽거나 죽기 직전이 되어 있었다. 이사를 하면 사람만 고생하는 건 아니다. 어디에 두더라도 잘 자라는 화초도 있지만 예민한 녀석들은 적응에 어려움을 겪는다. 화분을 옮기면 화초가 받는 일조량, 일조 시간, 통풍 정도, 습도 등이 달라지니까 사람으로 치면 출퇴근 시간, 식사 시간, 배급량 등이 달라지는 큰 변화를 겪는 셈이다.
나의 한국행으로 인해 고초를 겪은 건 화분이 심긴 화초뿐이 아니었다. 새집을 얼른 아늑하게 꾸미고 싶은 욕심에 버려진 식재 공간에 흙을 고르지도 않고 여린 가지들을 삽목해 놓았는데 이 녀석들도 처참한 모습이 되어 있었다. 물론 무작정 방치한 것은 아니고 남편에게 일주일에 한 번 물을 주어야 한다고 최대한 간략한 과제를 내주긴 했었다. 하지만 새로운 환경에 적응해야 하는 화초나 아직 뿌리도 채 내리지 못한 가지들은 주 1회 물주기 이상의 세심한 관찰과 돌봄이 필요했던 거다.
화초의 피해는 다양했다. 스파티필름은 항상 같은 모습이어서 조화인 줄 알고 물을 안 주어서 데친 시금치 모습이 되어 있었고, 습한 공기를 좋아하는 작은 고무나무는 스프레이를 해주지 않아 새순이 말라버렸다. 그중 가장 큰 희생자는 삽목한 화초들이었다. 기는줄기(runner)를 떼어 옮겨 심었던 남천(Nandina) 묘목은 뿌리가 제법 튼실해 보여서 마음을 놓았었는데, 십 년 넘게 잡초 한 포기 안 자라던 땅에서는 살아남지 못했다. 대체로 생명력이 징글맞도록 강한 제라늄조차 단단하고 메마른 흙에서는 뿌리를 내리지 못했다. 완전히 죽지는 않았지만, 알로에와 삽목한 다육이들도 뿌리를 조금도 내지 못하고 시들고 말았다. 피트모스나 코코 코이어처럼 부드럽고 수분을 머금어줄 재료를 조금만 섞어주었어도 살았을 텐데. 별생각없이 서두른 것이 후회스럽고, 괜히 모체에서 분리되어 죽어버린 화초들에게 많이 미안했다. 사실 세심하지 못한 성격에 그 동안 수많은 화초들을 죽였다. 이제 그 무덤 더미가 더 커졌다는 죄책감마저 들었다.
기대하지 않았는데 신기하게 살아남은 녀석도 있다. 이전 집에서 거름을 만들던 통에서 자라난 한 뼘 크기의 대추토마토 모종이다. 이사 올 당시 마당에는 거의 대부분의 면적에 모포가 덮여 있었다. 잡초가 자라지 못하고 관리가 쉽도록 하는 용도였던 걸로 보이는데, 울타리 아래 한 구석에 버킷 하나만큼 Potting soil이 들어 있었다. 이 흙 안에 바싹 마른 가느다란 뿌리가 있는 걸 보면 예전 세입자가 이곳에 화초를 심었던 것 같다. 내 토마토 모종은 기껏해야 한 뼘 정도이고 몸체도 가늘어서 죽은 뿌리를 가볍게 뽑아낸 자리에 별 기대없이 모종을 심었었다. 그런데 돌아와보니 제법 몇 단씩 잎을 내며 자라있었고 지금은 콩알만 한 열매들을 주렁주렁 달고 있다.
똑같이 일주일에 한 번 물을 먹고도 살아남은 화초는 좋은 흙에 심어진 화초였다.
중요한 건 흙이었다.
아무리 뿌리가 튼실하더라도, 원래 생명력이 강하더라도 척박한 흙에서는 생명이 살 틈을 찾을 수 없다는 사실이 새삼 깨달아졌다. 작은 뿌리 하나라도 새로 나오려면 촉촉함을 머금어주는 흙이 필요하며, 어렵게 머리를 내민 뿌리가 조금씩 자라려면 흙이 보드라워야 함을 너무 쉽게 간과했었다. 뿌리이든, 생장점이든 촉촉하고 부드러운 흙을 만날 때 생존할 수 있고 자라날 수 있는 건 지극히 당연한 자연의 이치인데 말이다.
화초뿐일까.
아직 어린 생명에게는, 사람이든 화초이든, 숨쉬고 자라기 위해서는 촉촉하고 부드러운 환경이 꼭 필요하다는 생각을 한다.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번져나간다. 나는 촉촉하고 부드러운 엄마였는지, 이 사회는 취약한 사람들이 뿌리를 내리고 번성할 수 있는 환경인지 여러 생각이 스쳐간다.
그림: 토마토, Watercolor on paper, 9x12 in, 2021, Julie Hughes 소장
By Eunyoung Park
나의 한국행으로 인해 고초를 겪은 건 화분이 심긴 화초뿐이 아니었다. 새집을 얼른 아늑하게 꾸미고 싶은 욕심에 버려진 식재 공간에 흙을 고르지도 않고 여린 가지들을 삽목해 놓았는데 이 녀석들도 처참한 모습이 되어 있었다. 물론 무작정 방치한 것은 아니고 남편에게 일주일에 한 번 물을 주어야 한다고 최대한 간략한 과제를 내주긴 했었다. 하지만 새로운 환경에 적응해야 하는 화초나 아직 뿌리도 채 내리지 못한 가지들은 주 1회 물주기 이상의 세심한 관찰과 돌봄이 필요했던 거다.
화초의 피해는 다양했다. 스파티필름은 항상 같은 모습이어서 조화인 줄 알고 물을 안 주어서 데친 시금치 모습이 되어 있었고, 습한 공기를 좋아하는 작은 고무나무는 스프레이를 해주지 않아 새순이 말라버렸다. 그중 가장 큰 희생자는 삽목한 화초들이었다. 기는줄기(runner)를 떼어 옮겨 심었던 남천(Nandina) 묘목은 뿌리가 제법 튼실해 보여서 마음을 놓았었는데, 십 년 넘게 잡초 한 포기 안 자라던 땅에서는 살아남지 못했다. 대체로 생명력이 징글맞도록 강한 제라늄조차 단단하고 메마른 흙에서는 뿌리를 내리지 못했다. 완전히 죽지는 않았지만, 알로에와 삽목한 다육이들도 뿌리를 조금도 내지 못하고 시들고 말았다. 피트모스나 코코 코이어처럼 부드럽고 수분을 머금어줄 재료를 조금만 섞어주었어도 살았을 텐데. 별생각없이 서두른 것이 후회스럽고, 괜히 모체에서 분리되어 죽어버린 화초들에게 많이 미안했다. 사실 세심하지 못한 성격에 그 동안 수많은 화초들을 죽였다. 이제 그 무덤 더미가 더 커졌다는 죄책감마저 들었다.
기대하지 않았는데 신기하게 살아남은 녀석도 있다. 이전 집에서 거름을 만들던 통에서 자라난 한 뼘 크기의 대추토마토 모종이다. 이사 올 당시 마당에는 거의 대부분의 면적에 모포가 덮여 있었다. 잡초가 자라지 못하고 관리가 쉽도록 하는 용도였던 걸로 보이는데, 울타리 아래 한 구석에 버킷 하나만큼 Potting soil이 들어 있었다. 이 흙 안에 바싹 마른 가느다란 뿌리가 있는 걸 보면 예전 세입자가 이곳에 화초를 심었던 것 같다. 내 토마토 모종은 기껏해야 한 뼘 정도이고 몸체도 가늘어서 죽은 뿌리를 가볍게 뽑아낸 자리에 별 기대없이 모종을 심었었다. 그런데 돌아와보니 제법 몇 단씩 잎을 내며 자라있었고 지금은 콩알만 한 열매들을 주렁주렁 달고 있다.
똑같이 일주일에 한 번 물을 먹고도 살아남은 화초는 좋은 흙에 심어진 화초였다.
중요한 건 흙이었다.
아무리 뿌리가 튼실하더라도, 원래 생명력이 강하더라도 척박한 흙에서는 생명이 살 틈을 찾을 수 없다는 사실이 새삼 깨달아졌다. 작은 뿌리 하나라도 새로 나오려면 촉촉함을 머금어주는 흙이 필요하며, 어렵게 머리를 내민 뿌리가 조금씩 자라려면 흙이 보드라워야 함을 너무 쉽게 간과했었다. 뿌리이든, 생장점이든 촉촉하고 부드러운 흙을 만날 때 생존할 수 있고 자라날 수 있는 건 지극히 당연한 자연의 이치인데 말이다.
화초뿐일까.
아직 어린 생명에게는, 사람이든 화초이든, 숨쉬고 자라기 위해서는 촉촉하고 부드러운 환경이 꼭 필요하다는 생각을 한다.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번져나간다. 나는 촉촉하고 부드러운 엄마였는지, 이 사회는 취약한 사람들이 뿌리를 내리고 번성할 수 있는 환경인지 여러 생각이 스쳐간다.
그림: 토마토, Watercolor on paper, 9x12 in, 2021, Julie Hughes 소장
By Eunyoung Pa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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