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로 읽는 세상 이야기
본문
바람의 일대기 / 성백군
1, 유년기 : 심야의 결투
목(木)양의 머리채가
풍(風) 씨의 목을 감고 상모 춤을 춘다
부딪히고 넘어지고 나뒹굴고,
그래 봤자 풍(風) 씨
목(木)양의 품속을 탈출하지 못하고
치마만 들썩거린다
태생이 바람둥이라
아무나 건드리더니 오늘
목(木)양을 만나 반쯤 죽나 보다
어둠이 들썩일 때마다
터져 나오는 목(木)양의 교성에
밤의 적막이 찢긴다. 풍(風) 씨의 몸도 함께 찢긴다
떨어지고 짓밟혀서
앞뜰 망고나무 아래 널브러진 잎사귀들은
승리의 희생이라 여기면 위로가 되겠지만
간밤, 그 난리 통에도 풍(風) 씨의 바람기는 어떻게 하나?
어느새
낙엽 아래 파닥이는 새끼들 까 놓았으니
올여름에도 이 싸움의 후유증이 만만찮겠다
저것들이 자라서
태풍 맞지 않도록 미리 준비하는 것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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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장년기 : 초전 풍 박살(草戰 風 迫殺)
(심야의 결투에서 木양에게 패한 風 씨가
길바닥에 주저앉아 가랑잎을 굴리며 신세타령을 하는데)
바람의 한숨 소리에 길가의
풀들이 놀라고
바람의 작은 콧김에도 흔들리는 草양을 본 風 씨가
꿈틀꿈틀
허공을 붙잡고 구름을 긁어모아 힘을 기른다.
이번에는 바람기가 아니라 생존본능이라고
조심조심 가만가만 草양을 건드린다
싱싱한 감촉, 향긋한 냄새에 개걸침을 흘리는 風 씨
더는 못 참고
한 입 덥석 베어 무는데
살짝, 이빨 사이로 빠져나가
새초롬한 눈길로 약을 올리듯 째려보는 草양
“뭐, 저런 게 있어
종로에서 뺨 맞고 한강에 가서 눈 흘긴다더니
木양에게 당하고 나한테 엉겨 붙어!”
약하다고 얕보다가 草양에게 황당하게 당한 風 씨
먹은 욕이 헛배를 불리기 시작하다가 배가 터졌다
화난 바람,
위아래도 분간 못 하고 성질대로 풀을 몰아치는데
草양의 나긋나긋한 허리는 낭창낭창 휘어지며
요리조리 피하며 몰래 준비한 홀씨를 뿌린다.
치면 칠수록 草양의 영역은 넓어지고
風 씨, 뒤늦게 후회해 보지만 이미
뒤통수를 미는 장풍의 가속도를 멈추게 할 수 없어
제 몸이 지쳐 쓰러질 때까지 헛바람만 일으킨다
결국, 나는 이번 세상에서도 지나가는 바람이었다고
정도를 벗어난 한때의 바람기였다고
패배를 인정하면서도 아직 죽을 수는 없다는 風 씨
草양의 치맛자락에 검불로 붙어 기사회생을 노린다
다음 세상에서는……, 기대하시라!
다음이 있는 한 희망은 있다고
맑은 하늘이 검불이 된 風 씨의 눈에 구름 한 점 찍는다
*초전 풍 박살 : 풀이 전쟁에서 바람을 핍박하여 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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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노년기 : 꽃샘바람
(봄이 왔다고 햇볕이 뜨락에 내려와 모닥불을 피우면
풀과 나무는 겨우내 얼어붙은 몸을 녹이며 기지개를 켠다.
쭉쭉 늘어나는 草 양과 木양의 몸매를 바라보던 風 씨
반했나, 무서웠던가? 촉각을 곤두세우며 달려드는데)
나목을 핥고 지나가는 꽃샘바람
혓바닥에 가시가 있나 봅니다
바람이 스칠 때마다 살갗이 터져
가지마다 싹이 돋네요
아프라고 찔렀는데, 추우라고 벗겼는데
찌를수록 새살이 나오고
벗길수록 덥기만 하니
꽃샘바람, 風 씨
춘정(春情)에 취하여
상사병이 났네요
(마침내 봄을 맞아 이곳저곳으로 풀과 나무를 찾아다니며
꽃 피우는 것이 좋다는 風 씨, 草양과 木양의 새서방이 되었다고
풀과 나무 사이에서 살랑거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