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 칼럼

황미경의 우리말 산책_ 2. ‘세밑’과 ‘세모’, ‘송년회’와 ‘망년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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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세밑’과 ‘세모’, ‘송년회’와 ‘망년회’



한 장 남은 2024년 달력이 허허롭습니다. 연말이 되니 한 해 동안 맺어온 귀한 인연들과의 모임 약속들로 달력이 빼곡히 채워지기 시작합니다. 몸과 마음이 바쁜 것이 비록 힘은 들지라도 좋은 사람들과 한 해를 마무리하며 덕담을 나누다보면 허전했던 마음도 어느덧 감사함으로 채워지더군요.


연말을 뜻하는 우리말에 ‘세밑’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세밑’은 ‘세밑 한파 절정, 세밑 뮤지컬과 음악으로 풍성하게’와 같이 연말 한국 뉴스에서도 자주 등장하는 단어입니다. ‘세밑’은 나이, 세월을 뜻하는 한자어 ‘세(歲)’와 아래쪽을 뜻하는 순우리말 ‘밑’이 결합된 단어로 ‘한 해가 끝날 무렵’이라는 뜻입니다. 저는 ‘연말’보다 ‘세밑’이라는 단어를 더 좋아합니다. 한 해의 마지막을 강조하는 마침표처럼 느껴지는 ‘연말’과 달리, ‘세밑’은 한 해의 마지막 날과 다가오는 새해의 첫 날을 이어주는 이음표처럼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세밑’과 비슷한 뜻을 가진 말로 ‘세모’가 있는데 이는 ‘한해(歲)가 저문다(暮)’는 뜻을 가진 일본식 한자어입니다. 따라서 국립국어원에서는 ‘세모’가 아닌 ‘세밑’을 사용하기를 권장하고 있습니다.

한편 연말에 한 해를 보내며 갖는 모임을 ‘송년회(送年會)’ 또는 ‘망년회(忘年會)’라고 합니다. 하지만 ‘망년회’는 요즘 잘 쓰지 않는 말입니다. 이는 일제강점기 때 우리나라에 유입된 단어로, 본래는 일본의 연말 풍습을 뜻하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일본에서는 연말에 평소 가깝게 지내던 사람들이 함께 만나서 괴롭고 힘들었던 일들은 모두 잊어버리자는 의미로 음주가무를 즐기곤 했는데, 이를 ‘망년회(忘年會)’라고 불렀습니다. 국립국어원에서는 이것이 일본식 한자어 표현이므로 ‘망년회’를 ‘송년회’나 ‘송년모임’ 등으로 순화해서 쓸 것을 권고하고 있습니다.  ‘송년회(送年會)’는 묵은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이한다는 ‘송구영신(送舊迎新)’에서 나온 말인데 연말에 한해를 보내는 아쉬움을 서로 나누기 위해 갖는 모임입니다. 그러니 그저 먹고 마시며 한해를 잊어버린다는 ‘망년회’에 비해서 보다 긍정적인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송년회’는 우리 선조들의 세시 풍습인 ‘수세(守歲)’와도 그 의미가 맞닿아 있습니다. 우리 옛 선조들은 음력 12월 30일인 섣달 그믐(다른 말로 ‘제야(除夜)’)에 ‘수세’를 했습니다. ‘수세’는 방, 마루, 부엌, 뒷간 등 집안 곳곳에 등불을 밝히고 온 가족이 모여 밤을 새던 풍속입니다. 특히 부엌귀신인 조왕(竈王)이 천신(天神)에게 그 집에서 일년 동안 있었던 일을 보고한다고 믿었는데,  선조들은 부뚜막 솥 뒤에 불을 밝혀 조왕에게 경의를 표하여 그 집안의 좋은 일만이 보고되기를 바랐습니다. 또한 수세하지 않고 잠을 자면 눈썹이 하얗게 변한다고 믿었기에 사람들은 새벽 닭이 울 때까지 윷놀이를 하거나 재미있는 이야기를 나누며 잠을 쫓았다고 합니다. 일년 동안 집안에서 있었던 일 중 좋은 일만이 기억되기를 바라는 마음, 가족들끼리 모여 밤새도록 이야기를 나누는 정과 즐거움. 이것이 우리 선조들이 한 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는 방식이었습니다.

저도 올해 연말에는  ‘수세’의 의미를 떠올려보며 그저 잊기 위해 먹고 즐기는 ‘망년회’가 아닌, 소중한 사람들과 의미있는 이야기들을 나누며 보내는 뜻깊은 ‘송년회’를 계획해 봐야겠습니다.

**필자소개/ 황미경_이화여자대학교에서 국어학 박사 학위를 받고 10년 남짓 대학에서 한국어를 가르치고 연구해왔다. 현재 샌프란시스코 한국교육원의 Adult Korean Class에서 미국의 성인들을 대상으로 한국어를 가르치고 있으며, 한국어 연구자, 한글학교 교사로서도 다양한 활동들을 하고 있다.  이메일 주소: mkhwangkorean@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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