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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닝레터-낭만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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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만에 대하여

한국과 미국에서 다 살아본 사람이라면 많이 받는 질문들이 있습니다. 어떤 부분에서 한국이 더 낫고, 미국이 더 좋은 지에 대한 내용입니다. 각자 가지고 있는 기준에 따라 답은 다 다를 겁니다.
무척 사소한 것이지만, 저에게는 ‘동네 슈퍼에 걸어다는 것’에 대한 즐거움이 참 컸습니다. 검은 봉다리 두세 개쯤 들고(지금은 종량제 쓰레기봉투나 장바구니를 들겠지만요) 이것저것 구경도 하고, 꽃바람도 맞으며 군것질도 하는 거죠.  한국에서만 느낄 수 있는 정취라 언제든 ‘한국이 더 좋은 점은 뭐야?’ 란 질문에 “마트 걸어다니는 것!” 이라 말하곤 합니다.

미국에 처음 왔을 때는 마트에 들어서면서 느껴지는 풍요로움에 압도되기도 했습니다. 복도마다 깨끗하게 진열된 풍부한 상품들에 보기만 해도 만족스러워 하기도 했죠. 그런데 언제부터인지 마트에 가는 것이 일로 느껴지고, 늘 차를 끌고 다녀야한다는 게 부담스러워지는 순간을 맞았습니다.

어릴 적엔 골목 끝 슈퍼에 가서 두부 한 모, 콩나물 한 봉지 사오라는 똑같은 심부름에도 매번 걸리는 시간이 달라져서 엄마의 의아스러운 눈길을 받기도 했죠.
강아지와 마주치면 이야기도 좀 해야하고, 터지는 꽃망울 앞에서 감탄도 하고, 개미들이 굴파고 다니는 골목 어귀에선 자연공부도 하던 어렸던 저에게 엄마의 잔소리가 늘 봉다리를 내미는 손보다 앞서곤 했지만, 그러고보면 저는 꽤 일찍부터 걸어서 장보는 재미를 깨우친 것 같기도 합니다.

이번에 잠깐 한국에 다녀올 일이 있었습니다. 동네슈퍼들을 거의 찾을 수 없더라구요.
대신 자리를 차지한 대형마트의 작은 버전이나 편의점들을 보면서 추억을 빼앗긴 것 같아 조금 서글프긴 했지만, 걸어야만 보이는 것들이나 차 없이 즐길 수 있는 것들에 다시 즐거워하기도 했습니다.

가수 최백호의 ‘낭만에 대하여’ 노래 가사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왠지 한 곳이 비어있는 내 가슴에, 다시 못 올 것에 대하여.
낭만에 대하여’

시차적응에 실패해 새벽녘 점점 정신은 선명해지는데, 노래 가사처럼 왠지 한 곳이 비어있는 것 같기도 합니다. 그리움이겠죠. 걸어다니는 낭만이 있었던 그 시절이요.

글/한혜정(모닝뉴스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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