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 칼럼

그리며 하루하루_일상 3: 쓸모없는 존재의 쓸모

컨텐츠 정보

본문

이삿짐을 싸고 풀면서 꽤 머리를 굴려야 했다. 무엇을 버리고 간직할지를 정해야 했고, 어떤 물건이 이사 직전까지 필요할지를 가려야 하는 등 끊임없는 결정의 연속이었다.

수차례 이사 경험으로 터득한 요령이 있다면 장식품부터 싸기 시작하는 거다. 거실 구석에 세워둔 목각 꽃 장식이나 벽에 걸린 그림은 먼저 치운다고 해도 생활에 전혀 지장이 없기 때문이다. 피아노 위의 작은 세라믹 조각품들을 뽁뽁이 비닐로 감싸고, 구석에 세워둔 장식용 화병도 조심조심 포장했다. 장식품은 흠집이 생기면 복구가 어려운 경우가 많아서 걸어서 5분 거리에 있는 집으로 이사를 가더라도 꼼꼼하게 포장해야 마음이 놓였다.

한 반나절 짐을 싸다가 문득 집안을 둘러보았다. 쓸모없는 물건이 자취를 감춘 공간이 휑하고 낯설었다. 물건의 가짓수가 줄었으면 홀가분하고 가벼워 보여야 할 텐데 오히려 어수선해 보였다. 이곳이 어떤 곳인지 표정을 더해주던 존재가 공간에서 사라지자 혼돈이 찾아온 것 같았다.

나는 장식품을 박스에 넣던 일을 멈추었다. 일의 순서로 보자면 장식품을 모두 싼 다음에 사용 빈도가 낮은 것에서 높은 물건으로 넘어가는 것이 맞겠지만, 일부 장식품은 마지막까지 남겨두기로 했다. 이사 나가는 날까지 집다운 공간에 머물고 싶어서였다.

새집에 가구를 모두 들여놓고 당장 쓸 물건이 든 박스를 푼 뒤에는 집의 마감재들을 손보았다. 윤기를 잃은 목재 표면은 Restor-A-Finish를 걸레에 묻혀 닦아주고, 벌어진 틈새는 재료에 따라 코킹 재료나 우드 퍼티로 메웠다. 낡은 커튼을 떼고 공간에 어울리는 블라인드를 달았다. 누렇게 변한 조명은 미리 주문해 둔 모던한 조명으로 교체했다. 필요 없는 곳에 박힌 못도 뺐다.

어릴 때 종종 듣던 표현을 빌리자면, ‘쌀이 나오지도 밥이 나오지도 않는 짓’을 남의 집에 하느라 시간과 돈을 쓴 셈이다. 끝으로 벽에 액자를 걸고 이런저런 장식품을 집안에 어울릴 만한 곳에 놓아두고 나니 비로소 공간이 나를 반기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마찬가지로, 내 삶에 어떤 표정이 있다면 그것은 쓸데없는 일을 하는 시간이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멍하니 있거나 먼 산을 바라보거나 종이에 낙서를 끄적이거나 친구와 수다를 떨거나 사려는 사람 없는 그림을 그리거나 아무런 보수를 받지 않아도 이렇게 글을 쓰는 시간 덕분일지도 모른다.

세상에는 쓸모없는 무언가가 필요하고, 삶은 그것으로 생기를 찾는 것이라고, 나의 일은 그 쓸모없는 무언가를 세상에 내놓음으로써 나와 남의 삶에 생기를 주기에 가치 있다고 나를 토닥여본다.

By Eunyoung Park

관련자료

댓글 1

SVK관리자님의 댓글

  • 익명
  • 작성일
집이 화가님의 손길을 받아서 예술적으로 변할것만 같네요!
전체 619 / 1 페이지
번호
제목
이름

최근글


인기글


새댓글


Stats


  • 현재 접속자 539 명
  • 오늘 방문자 14,335 명
  • 어제 방문자 18,422 명
  • 최대 방문자 19,170 명
  • 전체 회원수 1,872 명
알림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