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 칼럼

모닝레터 - 결핍이 있는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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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호에 실렸던 와인메이커 취재 도중에 귀에 쏙 들어오는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와인을 만드는 포도나무는 물이 부족한 곳에서 오히려 더 향이 풍부한 좋은 포도를 만들어 낸다는 거였습니다.

보통 어떤 농사던 물이 풍족한  땅에서 수확도 풍부할 것이란 상식을 완전히 깨는 거였죠. 물이 많은 곳에서의 포도나무는 뿌리를 그리 깊숙이 내리지 않아도 돼서 땅 속 깊은 곳에 있는 미네랄 성분을 흡수할 수 없다고 합니다. 또 물이 풍족한 땅에서는 덩굴이 무성해져서 포도송이에 햇빛이 닿기 힘들어져 맛은 밋밋해진다는 거였습니다. 오히려 척박한 땅에서 뿌리를 내리려 고군분투한 포도나무일수록 더 맛있는 포도가 열린다고 하니 와인을 볼 때 포도의 노력이 보이는 것 같기도 했습니다.

물이 부족하면 지하수를 찾아 뿌리를 길게 길게 내리는 포도나무. 우리도 마찬가지 아닐까요.

무엇이든 넘쳐나는 곳에서는 절실함이 생겨날 수 없습니다. 절실함이 없는 상태에서 찬밥 더운밥 가리지 않고 해보겠다 덤벼드는 열정이 생기기란 참 어려운 일입니다.

얼마 전엔 베이 지역에 한국에서 기자들이 찾아와 온라인 한인 커뮤니티까지 도움을 청하는 게시물을 올리는 일이 있었습니다. 부모들의 집착이 지나쳐 아이들의 미래를 망치는 일을 서슴지 않았던 대입비리와 관련된 취재였다고 합니다.

생각해봅니다. 수십 건의 논문, 그 학생의 하루가 어땠을 지 상상이 안되는 정도의 액티비티, 성적관리 등 그 학생의 넘치도록 수많은 활동들은 당장의 대입에 도움을 줄 수 있을지는 모릅니다. 마치 물이 풍족하고 비옥한 땅에서 자란 포도나무가 쑥쑥 크고 덩굴은 무성해지듯이요.
하지만 그 포도나무가 만든 포도는 결국 무용지물일 뿐입니다. 맛없는 포도를 바꿔보려는듯 대학 이후의 삶까지 부모가 관여를 하려한다면 아이의 인생을 망치겠다 작정하는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약간은 모자란듯 해야 필요가 생기고 그 필요함이 절실함으로, 열정으로 이어지는 법입니다. 지하수를 찾아 땅 속 깊은 곳까지 뿌리를 내린 포도나무가 가뭄도 이겨 냅니다. 또 지하 깊숙한 곳에서의 미네랄과 영양성분을 받아들여 독특한 맛과 향이 가득한 포도로, 아주 좋은 와인으로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결핍이 있는 삶, 그래서 그리 나쁜 것만은 아닐지 모릅니다. 결핍이 있으면 결실도 있는 것이라고 포도나무가 말해주고 있으니까요.

글/ 한혜정(모닝뉴스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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